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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월 - 허연 / 내가 여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by vinna 2024. 11. 20.

 

7월이 끝나기 전에 쓰고 싶었고,

장마가 드디어 끝났다는 소식을 들은

7월의 마지막 날 기어코 써보기로 한다.

 

 


 

 

 

 

2019년 가을, 멀지 않은 곳의 작은 서점에서

허연 시인님의 낭독회가 있다는 소식에 바로 예약을 했다.

시인님의 시집이 있다면 가져오라는 안내를 받고

내가 가지고 있던 시집을 모두 가져갔다.

많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

눈을 반짝이며 시인님의 시를 읽고

감상을 나누고, 시인님의 이야기를 들었다.

한여름밤의 꿈같았던 낭독회가 끝나고

작은 사인회가 열렸다.

한참을 기다려 내 차례가 됐고

이름이 예쁘다는(!) 칭찬과 함께 사인을 해주셨다.

사인 밑에는 짧게 한 문장씩 적어주셨는데,

시집 <불온한 검은피> 차례가 됐을 때

가장 좋아하는 구절을 요청드렸더니

흔쾌히 그 구절을 적어주셨다.

정말 기쁘고 행복했던 기억으로 남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살아있어서 다행이다' 라고 생각했다.

응. 살아있어서 다행이야.

 

 


 

 

 

 

가을 밤에 받았던 사인들과

그 시집들 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시 한편씩을

기록해 보기로 한다.

 

 


 

 

 

 

<불온한 검은 피>가 두 권인 이유는

집에서 잃어버렸기 때문...

어느 날부터 <불온한 검은 피> 시집만

보이지 않아서 온 집안을 다 뒤집고

심지어 회사까지도 샅샅히 찾았는데도 못 찾았다.

한참을 상실감에 빠져있다가

마침 새 산문집이 나왔길래 같이 구매했는데

그 뒤에,

찾았다.

엄마 방 책장 한 구석에서.

허탈감보다는 안도감이 훨씬 더 컸다.

찾아서 다행이야, 정말.

 

 

 

모두 다 절망하듯 쏟아지는 세상의 모든 빗물

내가 여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칠월

쏟아지는 비를 피해 찾아갔던 짧은 처마 밑에서 아슬아슬하게 등 붙이고 서 있던 여름날 밤을 나는 얼마나 아파했는지

체념처럼 땅바닥에 떨어져 이리저리 낮게만 흘러다니는 빗물을 보며 당신을 생각했는지. 빗물이 파 놓은 깊은 골이 어쩌면 당신이었는지

칠월의 밤은 또 얼마나 많이 흘러가 버렸는지. 땅바닥을 구르던 내 눈물은 지옥 같았던 내 눈물은 왜 아직도 내 곁에 있는지

칠월의 길엔 언제나 내 체념이 있고 이름조차 잃어버린 흑백영화가 있고 빗물에 쓸려 어디론가 가 버린 잊은 그대가 있었다

여름날 나는 늘 천국이 아니고, 칠월의 나는 체념뿐이어도 좋을 것

모두 다 절망하듯 쏟아지는 세상의 모든 빗물. 내가 여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청동거울처럼 오래 그대가 비춰지기를

 

 

 

오십 미터

마음이 가난한 자는 소년으로 살고, 늘 그리워하는 병에 걸린다

오십 미터도 못 가서 네 생각이 났다. 오십 미터도 못 참고 내 후회는 너를 복원해낸다. 소문에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축복이 있다고 들었지만, 내게 그런 축복은 없었다. 불행하게도 오십 미터도 못 가서 죄책감으로 남은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무슨 수로 그리움을 털겠는가. 엎어지면 코 닿는 오십 미터가 중독자에겐 호락호락하지 않다. 정지 화면처럼 서서 그대를 그리워했다. 걸음을 멈추지 않고 오십 미터를 넘어서기가 수행보다 버거운 그런 날이 계속 된다. 밀랍 인형처럼 과장된 포즈로 길 위에서 굳어버리기를 몇 번. 괄호 몇 개를 없애기 위해 인수분해를 하듯, 한없이 미간에 힘을 주고 머리를 쥐어박았다. 잊고 싶었지만 그립지 않은 날은 없었다. 어떤 불운 속에서도 너는 미치도록 환했고, 고통스러웠다. 때가 오면 바위채송화 가득 피어 있는 길에서 너를 놓고 싶다

 

 

 


 

 

 

 

아름다운 호숫가에 그대가 서 있네요

 

사랑詩 1

걸어서 천년이 걸리는 길을 빗물에 쓸려가는 게 사랑이지.

 

 


 

 

 

 

그대의 지층에 찬사를

 

 

그 산을 내려오지 못했다

몇 년째

아직도 그 산을 내려오지 못했다.

취한 자와 취하지 않은 자의 경계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저주를 퍼부으면서도 걸었다.

어려운 것들은 전부 내려오는 길에 몰려 있었고

길은 능청맞았다.

아주 자주

어이없이 작은 자갈들이 길을 막아섰다.

지층에서 기어 나왔을 하찮은 알갱이들이

반짝이며 날 아프게 했다.

기억은 여지없이 기억일 뿐이었다.

거대한 것들은 차라리 돌아서 갈 수 있었다.

우회할 수 없는

이 사소한 것들이 결국

내 길을 막았다.

주워 담을 수 없이 오랫동안 작고 아팠던 것들은

내려가는 길에 다 있었다.

내가 산에 갔던 날부터 지금까지

어떤 기억도

소멸하지 않았다.